역사 속 전염병의 공포를 잊은 현대 사회, 백신에 대한 불신이 공중 보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백신에 대한 불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증거 없이 홍역·볼거리·풍진(MMR) 백신과 자폐증을 연관 짓고,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mRNA 기술을 “가장 치명적인 백신”이라 비난하며 관련 연구 지원금을 삭감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의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망각의 움직임이다. 1963년 홍역 백신 도입 전 미국에서만 매년 수백 명이 사망하고, 20세기 초에는 연평균 6,000명이 목숨을 잃었던 역사를 잊은 듯하다.
300년 전 18세기 유럽을 휩쓴 천연두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감염 시 5명 중 1명이 사망할 정도의 공포 속에서 ‘인두법’이라는 초기 예방 접종이 등장했다. 인두법은 천연두 자체보다 훨씬 안전했지만, 신기술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신념이 결합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비평가들은 이를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비난했고, 접종 관련 거짓 소문이 횡행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립학회의 제임스 주린(James Jurin)은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인두법의 안전성을 입증했다. 그의 연구 결과, 인두법 접종 후 사망률은 50명 중 1명에 불과해 천연두 감염 시 사망률보다 현저히 낮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과학적 데이터만으로 대중의 두려움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예방 접종은 과학의 영역과 죽음에 대한 공포,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의 깊은 감정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때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준 인물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였다. 그녀는 칙령이 아닌 솔선수범의 힘으로 인두법을 도입했다. 자신과 아들이 직접 접종을 받음으로써 과학에 대한 신뢰를 몸소 보여주었고,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반면, 인두법에 회의적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1774년 천연두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80년 천연두 박멸을 선언하기까지 수억 명이 희생되었다. 20세기에만 3억 명의 비접종자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질병에 대한 인류의 기억은 쉽게 희미해진다. 천연두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고 배우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특히 지도자들의 몫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값비싼 망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